전북 익산시

배우고 싶다는 욕심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익산대로21길 1-9

국가무형유산 이리농악 이수자 권재환


직 업   전통타악연주자(꽹과리)

메 일   arrke04@nate.com

운 영   문의 후 방문

           010-2676-3504



#익산 #상모 #꽹과리 #아버지 #역마살

만남일_2020.09.11

에디터_설지희 | 사진_최정남

배우고 싶다는 욕심


 전북 익산시 익산대로21길 1-9

국가무형문화재 이리농악 이수자

권재환


직 업   전통타악연주자(꽹과리)

메 일   arrke04@nate.com

운 영   문의 후 방문 / 010-2676-3504


#익산 #상모 #꽹과리 #아버지 #역마살

만남일_2020.09.11 | 에디터_설지희 | 사진_최정남

만남


권재환 이수자는 문화통신사 김지훈 대표를 통해서 만나 뵈었다. 김 대표님께 무형문화유산 종사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은데, 국악 분야 이수자들을 소개해 줄 수 있냐고 여쭤보았다. 그중 한 분이 이리농악 권재환 이수자셨다. 전주 신시가지 카페 이디야에서 처음 만났다. 그는 목소리가 차분하고, 말을 신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람


권재환은 부모님의 권유로 판소리를 배웠다. 의욕 없는 사춘기를 보내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제안하였다. 성실히 하다 보니 전주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문제는 여전히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러던 중 타악하는 친구와 지내면서 다 같이 모여 악기를 치는 즐거움을 깨달았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 특별활동에서 사물놀이를 했던 기억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고3 때 타악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원광대학교 국악학과로 진학하였다. 크게 국악학과가 있었고 관현악과 장단, 연희 등 세부 전공으로 나뉘었다. 연희를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갈증이 계속됐다. 갈증을 해소하고자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올라가니까 연희가 크게 있고 세분이 되어있는 걸 봤어요. 그때 알았죠.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연희였다는 걸요. 장단을 하면 더 좋지 않냐고 말씀해 주신 선생님들이 계세요. 그런데 저는 상모를 돌리고 싶었던 거죠. 이리농악에 들어간 것도 상모를 배우고 싶어서였고요.”


솜씨


20살. 오로지 상모를 배우고 싶었다. 그 마음 하나로 이리농악 김형순 보유자와 김익주 선생님과 인연을 맺었다. 그가 상모에 꽂힌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할 수 있겠구나.’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매 순간이 즐거웠다면 거짓말이다. 답답하고 되는 일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은 불쑥 찾아왔다. 권재환은 탈출하듯 군대에 입대했다. 그 후 농악을, 꽹과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상경했다. 몰입한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이제는 자존심도 독기도 생겼다. 이 악물고 버티면서 배웠다. 그에게 서울은 힘들지만 즐거웠던, 애증의 시기이자 공간으로 남아있다. 그는 지금 꽹과리 수장이다. 


“꽹과리는 소리가 중요한 것 같아요. 소리가 어떻게 나느냐인데, 소음 악기다 보니까 잘못 치면 자칫 소음이 되어버려요. 어떻게 해야 더 좋은 소리를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많이 고민했죠.”

지역


그는 꽤 많은 지역을 돌아다녔다. 전주 송천동에 살다가 아버지의 발령으로 경남 삼천포에서 초등학교를 보냈다. 초등학교 CA에서 처음으로 농악을 접했다. 삼천포에 5년을 있다가 다시 전주로 돌아왔다. 대학생이었을 때 신시가지로 이사했다. 연희를 더 배우고 싶어 서울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대학원 생활도 직장 생활도 보냈다.


“서울에 거의 6, 7년 정도 살았어요. 사물놀이를 배우다 알게 된 형님을 따라다녔죠. 덕수궁에서 취대타도 해 보고, 정동극장에서 인턴으로 들어가 정사원으로 근무도 했어요. 그러다가 더 배워야 한다는 생각에 2018년에 중앙대학교 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인사


이리농악을 깊이 있게 고민하고 싶어 대학원을 들어갔다. 어떻게 하면 가락을 남길 수 있을까. 그는 2006년에 작고하신 故 박용택 상쇠의 가락을 분석하고 채보하였다. 그 시간을 통해 15년을 몸담은 이리농악의 깊이를 더 알고자 하는 욕구가 피어난다고 말한다. 그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농악이 즐거운 놀이와 삶으로 단단히 자리하는 것이다.


“과거 농악하면 데모나 시위할 때 사용하는 장르라는 인식이 있잖아요. 사실 농악은 농악다운 맛이 있는데 말이죠. 앞으로 저희의 몫은, 교육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농악을 경험하고 즐길 수 있는 더 나은 환경들을 만들어 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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