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가장 어려운 일은 변하지 않는 것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송정3길 19-7

국가무형유산 선자장 이수자 김대성


직 업   선자장

메 일   hapjukseon@naver.com

운 영   문의 후 방문

           010-9476-3304


참 여   2021 나에게 보내는 서신 展


#건설현장 #생선가게 #인후동 #합죽선

만남일_2020.08.25

에디터_설지희 | 사진_빛쟁이사진관

가장 어려운 일은 변하지 않는 것


 전북 전주시 완산구 송정3길 19-7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 이수자

김대성


직 업   선자장

메 일   hapjukseon@naver.com

운 영   문의 후 방문 / 010-9476-3304


참 여   2021 나에게 보내는 서신 展


#건설현장 #생선가게 #인후동 #합죽선

만남일_2020.08.25 | 에디터_설지희 | 사진_빛쟁이사진관

만남


날이 갈수록 느끼는 것은 ‘가업을 잇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한가’이다. 특히 한국은 가업을 잇는 풍경이 일반적이지 않다. 아마 한강의 기적이 낳은 시대변화 탓일 테다. 특히 전통 기술 분야는 부모 세대에서 잘 전해 주려 하지 않는다. 과거 ‘장이’들이 받는 취급도 있을 것이지만 무엇보다 들이는 노력에 비해 먹고사는 게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성은 아버지의 길을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벌이가 괜찮은 일도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의 담담한 지금의 모습이 참 대단하였다.


사람


군대를 마치고는 건설 현장을 다녔다. 금액이 크면 마다않고 일했다. 그렇게 현장 일을 하다 보니 25살에 손을 크게 다치기도 했다. 그때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벌 수 없을까 고민을 하였고, 전주공업전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학업의 가능성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귀한 인연을 만났다. 펜팔했던 여인과 3년 연애 끝에 결혼을 하였다. 28살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장모님이 편찮아지면서, 장모님이 운영하시던 생선가게를 맡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본업이 되어 10년 넘게 운영하였다.


본격적으로 부채 일을 거들기 시작한 것은 30대 초반이었다. 생선가게 일 외 시간에 아버지와 함께 거제도로 대나무 하러 가거나 부채 잔업을 도왔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 선자장으로 인정된 것이다.


“고민을 계속했죠. 아버지가 국가무형문화재가 되시던 해에 가장 진지하게 생각했던 거 같아요. 와이프는 반대를 안 했어요. 금전적 문제 때문에 걱정은 하죠. 장사를 했을 때는 사는 데 큰 걱정은 안 했으니까요.”


솜씨


어릴 적 기억에 아버지는 일만 하는 분이었다.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부채를 만드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을 참 많이 하셨다. 중간중간 부모님께서는 김동식에게 ‘아버지 일 안 해 볼래?’라고 물어보곤 하였다. 젊을 적에는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재밌게 사는 게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아버지 일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로서 세월이 꽤 흘렀다. 부채 일을 배워보니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변하지 않는 것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합죽선(合竹扇)은 대나무 피와 피를 합쳐서 만든 부채라고 해서 합죽선이라고 해요. … 처음 부채 일을 시작했을 때 저는 이윤을 남기는 방법을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그렇지 않더라고요. 하나는 만들더라도 항상 최선을 다 하셨어요. 안목이 좋으신 분들은 다 알아보더라고요. 지금은 알아요. 아버지의 신념이 어떤 건지. 저도 그렇게 가야죠.”

지역


1976년생 김대성의 본적은 전주 인후동이다. 꼬마 김대성은 산이고, 냇가고 온 동네를 놀러 다녔다. 산에 올라가서는 개구리를 잡아서 줄줄이 꼬챙이로 만들어 구워 먹기도 하고, 냇가에서 놀기 위해 굳이 고무신을 신고 등교하기도 했다.


집은 전형적인 대가족이었다. 조부모님, 시집 안 간 고모와 함께 살았다. 그 외에도 동네 자체가 아버지 외가 동네인 ‘라씨 부락’이었다. 할아버지가 환갑잔치 때 140평 마당이 꽉 찰 정도의 친지들이 모이기도 했다. 동네 자체가 모두 가족들이었다.


“버스 승강장에서 부락 가는 길에 우리 집이 있었어요. 친척들이 항상 우리 집에 들러 밥 먹고 갔어요. 그래서 어쩔 때는 어머니가 밥을 7번, 8번 차리고 했죠. 어머니가 엄청 고생하셨죠.”



인사


요즘 들어 자신을 종종 돌아보고 있다고 한다. 자신이 아버지에게 보이는 모습. 자신이 자식들에게 보이는 모습. 아버지가 되어서야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는 걸까. 아버지는 참으로 칭찬에 인색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어느새 아들에게 똑같이 대하는 자신을 마주하곤 한다.


나는 이 일을 잘하고 있는가. 전통 기술에 대한 아버지의 깊이를 잘 따라가고 있는가.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더욱 겉치레를 버리고, 실력에 몰입한다. 아버지 김동식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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