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
한국 우산 역사의 산증인
전북 전주시 덕진구 반태산3길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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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우산 역사의 산증인
전북 전주시 덕진구 반태산3길 29
직 업 우산장
메 일 sungho8742@naver.com
운 영 문의 후 방문 / 010-5604-8742
참 여 2022 와디즈 펀딩, 조각우산
2021 나에게 보내는 서신 展
#한지 #지우산 #우아동 #장재마을
만남일_2019.07.19 | 에디터_설지희 | 사진_윤성호
만남
우산장 윤규상 보유자를 알게 된 시기는 (재) 예올에서 진행한 <올해의 장인> 전이 열렸던 2016년이다. 단절될 뻔한 기술을 복원하였다는 점. 그 유일무이한 기술 보유자가 지금까지 존재한다는 점.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2019년 윤규상 보유자를 처음 뵈었다. ‘눈이 어쩜 저리 맑으실까'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성품과 눈매를 윤성호 이수자가 똑 닮았구나 싶었다. 윤규상 보유자는 어릴 적부터 지우산(紙雨傘, 한지우산)을 업으로 삼았다. 대부분 우산이 ‘made in china’가 아니었던 무렵, 지우산부터 비닐우산까지 한국 우산 역사의 산증인이자 전북무형문화재 우산장 윤규상의 이야기를 담아보았다.
사람
윤규상의 고향은 전북 완주군 용진면이다. 그는 10살에 상삼리 농촌 마을에서 자랐다. 상삼리에서 소양천을 건너면 바로 지우산 마을인 장재마을이었고, 17살 무렵(1958년)부터 우산 일을 시작하였다.
1965년, 윤규상은 우산공장을 차렸다. 지우산은 서울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팔려나갔다. 5년 정도 지나니 본격적인 공장들도 생겼다. 그러다 비닐이 수입되고, 지우산이 아닌 비닐우산을 주로 생산하였다. 1980년대 후반까지 우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점차 우산으로 생업을 이어나가기 어려워졌다. 경쟁력이 떨어지고 대량생산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대나무 다루는 기술을 살려 1990년대부터 뜨개바늘 공장을 열었다. 한창 뜨개질이 유행하던 시기여서 우산보다 이윤이 남았다.
지우산을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우연히 인천에서 만난 전주 사람의 제안이었다. (그는 전북무형문화재 제31호 한지발장 유배근 보유자였다.) 공정별로 여러 사람이 만들던 것이었고, 우산을 놓은 지도 수년이 지난 때였다. 그의 말이 계기가 되어 지우산 복원을 결심하였다.
솜씨
지우산은 대나무로 살을 만든 후 한지를 붙여 만든 우산이다. 담양에서 대나무를 구하고, 전주 한지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조선 시대까지 한지는 참으로 귀한 재료였다. 과거 왕실에서도 세초(洗草, 물에 한지를 씻어 글씨를 지우는 방법)를 거쳐 한지를 재활용하였으니, 민가는 얼마나 더 귀하게 여겼을까. 그런 한지로 우산을 만드니 단연 양반 이상이 사용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장가를 가거나 과거시험을 치르는 양반들의 모습에서 지우산을 엿볼 수 있다.
과거에 윤규상은 소가 끄는 수레에 대나무를 싣고 소양산을 건너왔다. 가져 온 대나무를 쪼개고 살대를 하나씩 다듬는다. 우산을 펼칠 수 있도록 살대를 모아 꼭지에 연결한다. 살대와 꼭지를 합치는 과정을 ‘골산'이라 한다. 이 과정이 끝나면 한지를 붙이고 기름칠을 해서 우산을 완성한다.
지역
장재마을에서 우산 일을 시작하였다. 장재마을은 전주역 뒤편에 위치하며, 전주미래유산 제11호로 등재되었다. 장재마을은 농한기 때 지우산을 만들었다. 집마다 직공(職工)들이 모여 일을 하였다. 모든 공예가 그러하듯, 여러 단계를 거쳐야 지우산이 완성되었다. 대나무만 쪼개거나 한지만 붙이는 등 파트별 담당자가 있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 윤규상은 우산 마디를 만드는 것, 대패로 미는 것 등 서너 가지 잡무를 맡았었다.
1, 2년이 흐른 뒤 제대로 우산 일을 배우고 싶었다. 공장 사장님께 말씀드려 대나무 살을 쪼개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할당량을 끝내니 원래 하던 잡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 일이 불씨가 되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소규모 공장으로 옮겼다. 그렇게 우산 일을 익혀 나갔다.
어릴 적 장재마을에서 우산일을 배울 때 참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일이 있었다. 처음 들어갔던 큰 공장 사장님 진우봉은 윤규상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으나 형님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일을 배우고 분담하는 과정에서 작은 다툼이 생겼다. 홧김에 윤규상은 일을 그만둔다고 했고, 형님도 ‘너 아니어도 쓸 사람 많다’며 사이가 멀어졌다.
그렇게 공장을 옮겼다. 며칠 뒤 형님이 찾아왔다. 작은 공장 사장님께 남의 직원을 데려가냐 마냐 하며 사건이 커져버렸다. 자신 때문에 마을 사람들끼리 싸우게 된 것이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지내던 중 우연히 형님을 마주쳤다. 못 본 척하는 형님께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마음을 털어놓으니 형님도 ‘고맙다’고 하시더라. 돌아오는 오솔길에서 윤규상은 가슴 깊이 울었다고 한다.
인사
아들 윤성호가 기억하는 아버지 윤규상의 모습은 ‘발명가'이다. 뭐든 심도 있게 연구하고 개발하는 아버지의 뒷모습 때문이다. 그는 늘 시대의 변화에 발명가적인 면모를 발휘하였다. 지우산을 만들다가, 비닐우산을 제작하였다. 대바늘로 노선을 변경하였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지우산 기술이 사라지지 않도록 복원을 결심하였다. 삶의 좌표에서 가장이 주는 무게감을 아는 이라면 그의 결심이 얼마나 큰 도전들이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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