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장재마을에서 우산 일을 시작하였다. 장재마을은 전주역 뒤편에 위치하며, 전주미래유산 제11호로 등재되었다. 장재마을은 농한기 때 지우산을 만들었다. 집마다 직공(職工)들이 모여 일을 하였다. 모든 공예가 그러하듯, 여러 단계를 거쳐야 지우산이 완성되었다. 대나무만 쪼개거나 한지만 붙이는 등 파트별 담당자가 있었다. 처음 들어갔을 때 윤규상은 우산 마디를 만드는 것, 대패로 미는 것 등 서너 가지 잡무를 맡았었다.
1, 2년이 흐른 뒤 제대로 우산 일을 배우고 싶었다. 공장 사장님께 말씀드려 대나무 살을 쪼개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러나 할당량을 끝내니 원래 하던 잡일을 하라는 것이다. 이 일이 불씨가 되어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소규모 공장으로 옮겼다. 그렇게 우산 일을 익혀 나갔다.
어릴 적 장재마을에서 우산일을 배울 때 참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일이 있었다. 처음 들어갔던 큰 공장 사장님 진우봉은 윤규상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으나 형님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 그러나 일을 배우고 분담하는 과정에서 작은 다툼이 생겼다. 홧김에 윤규상은 일을 그만둔다고 했고, 형님도 ‘너 아니어도 쓸 사람 많다’며 사이가 멀어졌다.
그렇게 공장을 옮겼다. 며칠 뒤 형님이 찾아왔다. 작은 공장 사장님께 남의 직원을 데려가냐 마냐 하며 사건이 커져버렸다. 자신 때문에 마을 사람들끼리 싸우게 된 것이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지내던 중 우연히 형님을 마주쳤다. 못 본 척하는 형님께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마음을 털어놓으니 형님도 ‘고맙다’고 하시더라. 돌아오는 오솔길에서 윤규상은 가슴 깊이 울었다고 한다.
인사
아들 윤성호가 기억하는 아버지 윤규상의 모습은 ‘발명가'이다. 뭐든 심도 있게 연구하고 개발하는 아버지의 뒷모습 때문이다. 그는 늘 시대의 변화에 발명가적인 면모를 발휘하였다. 지우산을 만들다가, 비닐우산을 제작하였다. 대바늘로 노선을 변경하였으며, 2000년대 초반에는 지우산 기술이 사라지지 않도록 복원을 결심하였다. 삶의 좌표에서 가장이 주는 무게감을 아는 이라면 그의 결심이 얼마나 큰 도전들이었을지 감히 짐작할 수 있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