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연장을 잘 다뤄야 그 다음이 돼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유기전2길 8

전북무형유산 악기장 보유자  최동식


직 업   악기장

메 일   byc0655@naver.com

운 영   문의 후 방문          




#현악기 #장수 #전주 #명주실 #믹스커피

만남일_2020.08.30

에디터_설지희 | 사진_최정남

연장을 잘 다뤄야 그 다음이 돼


 전북 전주시 완산구 유기전2길 8

전북무형문화재 악기장 보유자

최동식


직 업   악기장

메 일   byc0655@naver.com

운 영   문의 후 방문


#현악기 #장수 #전주 #명주실 #믹스커피

만남일_2020.08.30 | 에디터 설지희 | 사진_최정남

만남


익히 전북은 예향의 고장이라고 한다. 그만큼 음악, 놀이, 음식의 문화가 깊은 곳이다. 최동식은 거문고, 가야금 등 현악기 전문 악기장(樂器匠)이다. 1964년부터 지금까지 업을 이어오고 있는 57년 차 경력자이다. 나이가 무색할 만큼 나무와 연장 다루는 힘이 예사롭지 않다.


뜨거운 것을 먹어야 코로나 19 같은 지독한 바이러스를 죽일 수 있다며 믹스커피를 타주셨다. 그런 선생님의 모습에 친근한 사람 냄새를 느꼈다. 옛 방식의 지혜를 자신 있게 설명하시는 그의 확고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


4남매 막둥이라 예쁨도 많이 받았다. 그는 양반 집안의 자제였지만 일찍부터 교회에 다녔다. 주변에서 한 소리 했지만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는 교회를 계기로 장수에서 전주로 자주 들락날락하였다. 일찍부터 자신이 유별났다고 했다. 


군대에 제대한 이후인 24살 무렵(1964년) 결혼도 하고, 악기 일도 시작하였다. 처가가 있던 전주 동서학동에 터를 잡았다. 재인(才人: 예인)이었던 처남을 인연으로 국악기 판매직을 시작하였다. 선생님들께 주문이 들어오면 악기를 짊어지고 국악원으로 찾아가 납품하는 일을 맡았다.


전주로 나올 때는 맨몸으로 나왔다. 막둥이라서 받을 것도 없었고, 받을 생각도 없었다. 방 얻을 돈이 없어 공장 숙소 단칸방에서 부인이랑 아들과 산 시절도 있었다. 그러다 악기장의 길을 걷게 해 준 스승을 만났다.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 故 김광주 보유자(1906~1985)였다.


솜씨


일의 시작은 연장을 다루는 것부터다. 칼, 대패, 톱 등 연장을 잘 다뤄야 좋은 재료로 명품을 만들 수 있다. 


“연장이 안 좋으면 좋은 악기가 나올 수 없어.”


최동식은 원리를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전통을 고수하면서도 그것이 왜 더 좋은지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이다. 최동식이 명주실로 만든 현은 고집이 있다. 꼰 명주실을 나무막대에 감고 24시간 물에 담가서 충분히 물을 먹게 한다. 그러면 나무에 있던 송진이 나와서 자연스럽게 코팅된다. 이렇게 만든 명주실로 현을 만들면 질기고 음색이 잘 나온다.

지역


최동식은 장수군 계남면 고정마을에서 4남매 중 막둥이로 자랐다. 고정마을은 최씨 집안 종손들이 30부락 가량 모여 사는 집성촌이다. 산골 마을이었지만 가끔 예인, 소리꾼들이 방문하여 신파극을 펼치는 모습을 보며 ‘소리가 참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스물다섯 어느 날, 판매직 최동식은 김광주 선생님이 현악기용 명주실을 꼬는 모습을 보았다. 바짝 당겨가며 줄을 힘들게 감고 있었다. 최동식은 작업이 수월하도록 지지대를 대어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김광주는 말했다. “너 일 배워봐라.” 그렇게 최동식은 스승 김광주 선생님의 태평동 자택에서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했다.


“중앙시장 뒤편, 지금은 아파트 있는데 예전에 전매청이 있었거든, 담배 만들던 곳. 그 뒷골목에 살았어요. 거기 틈틈이 가서 어깨너머로 배웠죠.”



인사


전북무형문화재가 되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그 이후도 순탄치는 않았다. 어떤 기관에서 시연을 부탁받고 보름 만에 준비하여 올라갔지만 국가무형문화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다시 돌아가라는 답변을 받은 적도 있었다. 존중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으나, 이런 크고 작은 대우들이 쌓이다 보니 가족들도 함께 힘들어했다. 그럼에도 악기장을 잇겠다는 신념을 간직하고 있다.


“그때 화가 많이 났었죠. 내가 64년도부터 계속했는데 무시하니까 울화통이 터질 때가 많이 생기더라고요. 이제는 자식들 다 아버지 이제 쉬셔도 된다고 하는데, 나는 무형문화재로서 악기 만드는 일을 계속하고 싶어요.”

저작권자 © 프롬히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카카오톡 채널 채팅하기 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