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1970년생인 그는 평생을 전주에서 보냈다. 어릴 적에는 서서학동에 살다가 한옥마을과 인후동 일대에서 성장하였다. 전동성당부터 완산칠봉에 이르는 넓은 동네가 전부 그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아버지 가게와 자신이 다니던 중앙초등학교가 모두 한동네에 있었다.
“학교 끝나면 가방 던져놓고 동네 꼬마들끼리 모여 놀았죠. 우표집 아들내미, 세탁소집 아들내미 모여서 구슬치기하고 오징어 따먹기, 술래잡기하면서 놀고 그랬죠.”
최병용의 기억 속 집 풍경은 가야금과 거문고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놀다가 돌아오면 아버지와 삼촌이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놀곤 하였다. 서서학동 때는 ‘가야금 공장’이라 불렀고, 전동에서부터 ‘궁성국악사’라는 명칭이 생겼다.
“경기전 후문에 동아당한약방과 악기사들이 있었어요. 아버지의 궁성국악사도 그곳에 있었어요. 한 77년, 78년쯤에 개업해서 95년도까지 있었어요. 지금은 용머리고개 쪽에 있죠.”
인사
전라도는 국내 최대 곡창지대였던 오랜 역사와 함께 문화적으로 풍요로워 예부터 국악인들이 많았다. 그만큼 현재 전북은 가장 많은 무형문화재들이 있는 곳이다.
요즘 최병용의 고민은 ‘무형유산들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알릴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이다. 제도적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고집스럽게 하고 있는지를 알기에 더욱 고민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