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유기전2길 8
만남
현악기는 소목장의 영역이다. 나무를 다루는 기술이 우선이란 뜻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버지 최동식과 아들 최병용의 체격이 다부지다. 나무를 자르고, 깎고, 다듬은 다음 명주실로 현을 만들어 음률을 만든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악기는 그의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집이자 놀이터이자 아버지의 일터이자, 자신의 작업실이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뒤를 잇는 것이 쉬운 선택일 수는 없었다. 최병용이 걸어온 길을 들어보았다.
사람
부모님은 다 한 마음 한 뜻이다. 최병용의 부모님은 아들이 자신과 같이 고된 장인이 아닌 안정적인 전문직을 하길 바랬다. 그는 전교 2등의 성적으로 상고에 들어갔다. 자격증도 다 따놓고 성적도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은행 같은 금융권에 근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학교 입학을 결심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대학 생활을 해 보고 싶었어요. 형, 누나 모두 대학을 다녔으니까요. 근데 실수였죠. 공업대학에 가니 고등학교 때 놀던 친구들이 같은 동기로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래서 21살에 바로 군대에 갔죠.”
IMF 시기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최병용은 어머니와 함께 전북대학교 앞에서 김밥장사를 시작했다. 장사는 잘됐다. 밤낮으로 장사를 준비하고 김밥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가게를 넘겨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가게를 정리하고나니 20대의 청년이 손에 쥐기에는 무척 큰 돈이 생겼다.
“장사가 제법 됐어요. 그래서 또 IMF라는 게 없는 것처럼 일했죠. 그때 제가 20대 중후반이었는데 4년 동안 번 돈하고 권리금, 보증금 빼니까 1억 가까이 됐어요. 큰돈이었는데 하필 그때 주식이 붐이었죠. 어찌 됐겠어요. 청춘을 바친 것이 싹 사라졌지.”
솜씨
순탄치 않은 20대를 보낸 이후 자연스럽게 아버지 일을 배웠다. 그에게 악기 만드는 일은 언젠가 해야 하지만 마음먹기 어려운 어느 지점의 일이었다. 결심한 이후에는 빠르게 배웠다. 통짜 놓는 것, 대패질하는 것.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것을 곧잘 해냈다.
최병용의 아버지 최동식은 가야금,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 연주자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인사였다. 누군가 악기 소리를 듣고, 집요하게 캐물어 궁성국악사를 찾던 경우도 여러 차례다. 몇몇은 집까지 찾아와 악기를 보고 가기도 했다.
“거문고는 들어보면 알아요. 어떤 경우는 그분이 다른 사람 연주하는 걸 들었는데 소리의 울림이 예사롭지 않고, 무겁고 다르다는 거예요. 이거 어디 악기냐고 물어도 연주자들이 안 알려주더래요. 대부분 오래 지나고 나서야 이야기해 주는 것이 전주 궁성국악사 악기라고 했대요.”
지역
1970년생인 그는 평생을 전주에서 보냈다. 어릴 적에는 서서학동에 살다가 한옥마을과 인후동 일대에서 성장하였다. 전동성당부터 완산칠봉에 이르는 넓은 동네가 전부 그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아버지 가게와 자신이 다니던 중앙초등학교가 모두 한동네에 있었다.
“학교 끝나면 가방 던져놓고 동네 꼬마들끼리 모여 놀았죠. 우표집 아들내미, 세탁소집 아들내미 모여서 구슬치기하고 오징어 따먹기, 술래잡기하면서 놀고 그랬죠.”
최병용의 기억 속 집 풍경은 가야금과 거문고에 둘러싸여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놀다가 돌아오면 아버지와 삼촌이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놀곤 하였다. 서서학동 때는 ‘가야금 공장’이라 불렀고, 전동에서부터 ‘궁성국악사’라는 명칭이 생겼다.
“경기전 후문에 동아당한약방과 악기사들이 있었어요. 아버지의 궁성국악사도 그곳에 있었어요. 한 77년, 78년쯤에 개업해서 95년도까지 있었어요. 지금은 용머리고개 쪽에 있죠.”
인사
전라도는 국내 최대 곡창지대였던 오랜 역사와 함께 문화적으로 풍요로워 예부터 국악인들이 많았다. 그만큼 현재 전북은 가장 많은 무형문화재들이 있는 곳이다.
요즘 최병용의 고민은 ‘무형문화재들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알릴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이다. 제도적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길을 고집스럽게 하고 있는지를 알기에 더욱 고민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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