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 |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86
음영으로 인간 세계를 표현하다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주천동로 86
#촛불 #판화가 #민중미술 #조각칼
만남일_2021.05.11 | 에디터_소민정 | 사진_최정남
만남
편평한 판 위를 조각칼로 선과 면을 새기고 남은 부위에 물감을 묻혀 음영을 표현하는 판화에는 작가만의 제작 기법과 고민, 그리고 인고의 과정이 함께 배어 있다. 국내 손꼽히는 판화작가로 알려진 유대수 작가는 오랜 시간 대중과 예술인들 사이에서 문화 정책을 만드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근래에는 다시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사람
전주에 터를 잡고 천착하거나 깊이 있게 작업을 한 건 아니었어요. 취직했죠. 다행인 건 화가라서 놀아도 미술판에서 놀았어요. 갤러리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10년 이상을 전시기획자,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됐어요. 직장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자연스레 작업공간은 잘 사용하지 않았죠. 내가 더는 그림을 그릴 기회가 없겠구나 싶어 포기한다는 생각도 했고요. 그러다 촛불집회 시기를 지나왔고요. 더 지나기 전에 내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후회하겠다. 사회적으로 은퇴했을 때 내 손에는 무엇이 남아있을까. 기획서 몇 장으로 내가 만족할 수 있을까? 그림이 많이 남았으면 좋겠는데. 이런 생각들을 하고서 그림만 그리고 싶다는 욕심을 냈어요. 이제야 그게 3, 4년 쌓이면서 전시도 불러주시고요. 전에는 문화 정책, 문화 기획과 같은 단어가 저를 수식했거든요. 그런데 최근에는 판화가, 화가라고 불러줘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원하는 방향대로 가고 있으니까요. 다만 통장 잔고가 비어간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네요.
솜씨
인간의 삶의 모습을 표현할 때 막연하게 아름답거나 관념적인 건 피할 것. 제가 깊이 고민해 봤을 때 ‘내가 그냥 자연 풍경이나 꽃 그림을 그리면 민중미술가가 왜 이런 걸 그리지?’ 욕할 것 같고. ‘요즘 사건 사고가 잦은데 한가하게 다른 걸 그려도 되나?’ 이런 것도 있고.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강박관념으로 있었던 거예요. 그게 고민이었죠. 사실 그게 싫다는 건 아니에요. 그런 사건이 있을 때 ‘내가 다른 걸 하면 안 돼.’라는 강박관념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나. 최근에는 거의 이런 식이에요. ‘에라, 모르겠다. 일단 그리고 보자.’
살면서 제가 저에게 하는 말은 있어요. 사람의 문제를 떠나지는 말 것. 제가 어떤 기법이나 그림을 그리더라도 아마도 사람의 감정, 사람 사이의 일, 사람 때문에 만들어지는 일. 그런 걸 그리고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지역
사실은 돈이 없어서 내려왔어요. 전주가 고향이기도 하니까 편하고요. 문화적 토양도 활동하기에 나쁘지 않아요. 도시와 자연 구조가 좋으니 마음이 안정되는 측면도 있죠. 서울은 너무 바빠요. 많은 이가 그렇듯 서울에서 살 때는 너무 피폐하고 버티기 힘들었어요. 전주는 문화적으로 풍요롭다고 하는 도시니 괜찮은 도시라고 생각하기도 했고요. 물론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도 있죠. 시장이 작으니 재료를 구하기가 힘들어요. 유통 시장도 작고요. 그러니 예술인에게 지속성을 담보하기는 어렵죠. 필요한 물건을 구하려면 저리 가야하고 소비자 숫자가 적으니 도시로 나가기도 해야 하고요.
전주로 내려왔을 때 사실 전주에서는 93년도. 동학 100주년 사업하던 쯤이니까. 그때 지역 민중미술 단체에 들바람, 갑오세 사람들, 선배님들이 있었어요. 저도 동학 100주년 사업을 참여하게 되고 그러면서 개별 소모임 단체로 있지 말고 연합하자고 제안하고 그걸 주도적으로 진행하면서 전북미술인협회를 만들고 초대 사무국장을 했죠. 덕분에 지역사회에서도 민중미술가라고 한 것 같아요. 싫은 건 아니지만 오히려 평생 하신 분들이나 운동 열심히 한 분들에 비해 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쨌든 전 그냥 화가. 판화가도 아니고 미술가, 화가라는 말이 좋거든요.
인사
당장 발 앞에 놓인 일들에 치여 작품 활동은 접고 지낸 지가 오래. 촛불을 계기로 다시 조각칼을 집었을 때 유 작가는 모처럼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고민했습니다. 현실에서 판화를 그리고 그 판 위에 다시 현실을 그리는 유대수 작가. 어제와 오늘의 일상이 다르듯이 그의 작품도 오늘에 머무르지 않고 내일로 향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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