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정체성은 전통입니다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심청가) 이수자

최잔디


직 업   소리꾼

입 문   1993

메 일   nrg0080@naver.com

SNS   @choijandee


운 영   문의 후 방문

#광주 #철현금 #병원 #국악한마당

만남일_2020.11.19 | 에디터_설지희 | 사진_최정남

만남


최잔디를 만난 것은 순간이었다. 전주대사습놀이 공연 영상을 보던 중 그의 소리가 들어왔다. 깔끔하고 단단히 뿜어져 나오는 목소리와 자세가 일품이었다. 이리저리 검색하여 최잔디 블로그를 찾았다. 바로 연락을 드렸다. 감사하게도 프롬히어 인터뷰 제의에 동의하였다. 늦은 저녁, 서울 강남의 한 연습실에서 최잔디를 만났다.


사람


어릴 적 최잔디는 ‘노래 잘하는 아이’로 유명했다. 어디서든 노래를 하면 용돈을 받곤 했다는 그. 그 뒤로 쭉 노래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확신했다. 어머니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실력과 지원이 더해지니 승승장구하였다.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다녔고,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입학하였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다 이뻐하니까 ‘나 잘하는 사람인가보다’ 그랬죠. 되돌아보면 이기적인 꼬마였던 거 같아요.”


과거 자신을 ‘이기적’이라고 서술한 이유는 스무 살을 전후로 삶이 크게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한예종 입학 이후 집안의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었다. 어머니는 집안 사정을 미루다 미루다 털어놓고, 영화 〈기생충〉에 등장한 반지하 같은 곳으로 이사하였다. 가구는 물론 평생을 간직하고 싶었던 피아노까지 팔아치웠다. 무엇보다 노래하고, 공연하는 데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학교도 안 나가고 시험도 치지 못했다. 그 시기를 거치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되돌아보았다.


그렇게 20대의 8년이 사라졌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하고, 보컬트레이너도 하며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가보니 몸에 커다란 혹이 생겼다. 응급수술을 하고 회복을 위해 걸어 다니던 참이었다.


“아프지만 폴대를 끌고 1층에 내려왔는데, TV에서 〈국악한마당〉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남도민요를 부르고 있는 사람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하더라고요. ‘소리를 너무 하고 싶다. 안 하면 안 될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안 되겠다. 다시 시작해 보자.’하고 퇴원하자마자 학교에 재입학 서류를 제출했어요.”


솜씨


최잔디는 강산제 보성소리 ‘심청가’를 전공했다. 판소리는 이야기로 만든 소리이기 때문에 길이가 길고 장단의 변화가 무쌍하다. 더욱이 보성소리는 고재소리에 해당한다. 양반이 했던 소리이기에 창극화되지 않은 꿋꿋한 구석이 있으며, 상스러운 가사가 거의 없다.


8년의 공백 이후 스승을 찾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전통 분야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한 번 이어진 인연이 하루아침에 끊기지도 않는다. 한예종에 복학하니 스승 故 성창순 선생님이 계셨다. 엇나간 제자라고 여길 수도 있었지만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굉장히 엄하셨고요. 또 저를 너무 많이 예뻐하셨어요. 엄하게 혼내시고는 또 오셔서 김치 찢어주면서 밥 먹고 가라 하셨어요. 저한테 항상 그리운 사람이에요.”

지역


최잔디는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고모가 국악인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할아버지는 설장구 명인 최막동 선생이고, 고모는 성창순 선생님의 이수자였다. 여러 인연이 이어진 덕분에 고모와 같은 선생님께 소리를 이수 받았다. 국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집안의 영향보다는 우연이었다. 6살 때 이모와 함께 길을 걷다 우연히 국악 소리를 듣고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이모랑 지나가다가 국악 소리에 꽂혔어요. 2층 국악학원에서 나던 소리였죠. 고집부려서 학원에 올라갔던 기억이 나요.  내가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사


모든 사람의 일생은 한 편의 영화 같다고 한다. 최잔디의 이야기가 더욱 그랬다. 우여곡절을 겪은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감사하다고 한다. 국악인의 길을 응원해 준 가족과 선생님 복이 타고났다고 말한다. 어릴 적 광주에서 김향순 보유자와 이순자 보유자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강정숙 보유자에게 가야금 병창 및 산조를 사사하였다. 그녀의 20대를 품어준 故 성창순 보유자와 30대를 곁에서 함께하고 있는 김수연 보유자까지. 이렇듯 최잔디의 판소리와 가야금, 철현금에는 모든 인연과 사건이 담겨있다.


“올곧이 전통을 이어가고 싶어요. 예술가라면 일단 자신의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에게 정체성은 전통이고 명맥을 잇는 거죠.”

성창순(成昌順, 1934~2017):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전 보유자. 광주광역시 금남로 출생으로 강산제(정응민제) 보성소리를 이었다. 15세에 김연수창극단에서 소리를 사사하였다. 이후 철현금, 가야금 등 현악기를 습득하였다. 1991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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