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짜유기란 ‘정직’이라고 생각해요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문3길 19

전북무형문화재 방짜유기장 보유자

이종덕


직 업   방짜유기장

입 문   1992

메 일   bangzza62@naver.com

SNS   @bang_zza_62

운 영   AM 11:30-PM 18:00 (일요일 휴무)

          063-232-6289

#양천구 #종교 #명상종

만남일_2021.08.07 | 에디터_설지희 | 사진_이솔이

만남


방짜유기란 구리 78%에 주석 22%를 합금하고 일일이 두드려 기물을 만드는 전통기술이다. 주로 악기나 대야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방짜유기는 합금과 직접 메질을 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우직함과 정직함으로 지금까지 방짜유기를 고집하고 있는 전북무형문화재 제43호 방짜유기장 이종덕 보유자의 이야기를 담았다.


사람


그 시대 모두가 그랬지만, 저도 참 어렵게 살았어요. 저는 소위 ‘뚝방 동네'에 살았어요. 비가 오면 세간살이들을 뚝방 위에 올려두었다가 비가 그치면 다시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게 일상이었죠.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돈을 벌러 다녔으니까요. 양평동, 문래동 이런 곳에 칠보공예나 나전칠기, 한지공예 등이 많았어요. 거기서 칠보공예 일을 했죠.


저는 종교나 철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고등학생 때 교회 전도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저에게 존댓말을 하는 거예요. 그전에 제가 만난 어른들은 서로 비교하거나 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분은 달랐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 기독교를 접하게 되었어요. 이후에 불교나 명상 등에 심취하여 공부했습니다. 동시에 조금씩 방짜유기를 접하게 되었고, 방짜유기로 좋은 소리를 내는 연구로 연계된 거 같아요.

 

솜씨


예전부터 그림을 그리거나 만드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솜씨로 먹고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1979년, 서른 살에 공예품을 유통하는 일을 창업했어요. 직원을 뽑고 일을 하다 보니깐 만드는 걸 알려주고 하는 과정에서 제작과 연구를 지속하게 되었어요.


방짜유기는 구리 78%, 주석 22%를 섞어서 녹인 다음 손으로 두드려 만든 유기입니다. 제작과정이 까다롭고 숙련된 기술이 필요한데, 그만큼 변색이 잘되지 않고 멸균 기능이 뛰어나죠. 저에게 방짜유기는 ‘정직’이라고 생각해요. 가격이 높더라도 순수도가 높은 구리와 주석을 사용하고, 힘이 들더라도 직접 다 두드려 만들어요. 그래야 좋은 소리, 좋은 물건이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작업실을 전북으로 옮긴 것은 2006년이에요.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전주랑 김제는 방짜유기 특산지였어요. 호남평야로 수요층이 많았기 때문이죠. 저는 전북으로 내려와서 김제 원평에 개인 작업장, 익산에 공동작업장, 전주에 판매공간을 마련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지역


1959년, 충남 부여 출생으로 7남 2녀 중 셋째입니다. 부여는 어릴 적에만 살았고, 전라도나 경상도에서도 조금씩 살다가 서울에 자리 잡았어요. 아버지가 조경 일을 하면서 전국의 도로공사 일을 하시다 보니까 같이 온 가족이 움직인 거죠. 60년대만 해도 제 나이에 입학하기도 어렵고, 졸업하기도 어려웠어요. 한 교실에 80~90명 정도가 빼곡히 앉아있었죠. 


저는 초, 중, 고, 군 제대 때까지 서울 양천구에 쭉 머물렀어요. 어릴 적 놀던 기억을 이야기하면 1968년에서 1971년 정도였어요. 친구들이랑 해골바가지랑 뼈를 들고 놀았어요. 살던 곳이 서울시 양천구 화곡동, 신월동 정도였는데 원래 공동묘지였던 곳을 개발한다고 관을 파고 유골이 방치되고 그랬어요. 지금처럼 인권 의식이 높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죠. 



인사


이종덕 보유자는 요즘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직접 유기를 만지고, 만드는 경험을 할 수 있을까?’를 구상하고 있다. 사실 꽹과리나 징, 놋그릇은 익숙하지만 ‘방짜유기’란 단어는 상대적으로 낯설다. 삼국시대부터 신라동, 고려동이라 하여 유기의 명성을 이어간 만큼, 방짜유기가 낯선 단어가 아닌 친숙한 문화유산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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