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와 지우산 장인이 모두 있는 전주


전주 한지가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

문화유산이 건강히 전승되려면 크게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첫째, 질 좋은 재료가 공급되는 환경, 둘째, 정교한 솜씨를 가진 장인, 셋째,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수요이다. 이 세 가지를 고루 갖춰 발전한 것이 전주 한지라 할 수 있다. 


전주는 깨끗한 물이 계속 공급되는 흑석골을 중심으로 한지장이 모여 살았고, 문예를 즐기는 양반문화가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또한 완판본을 포함한 독서문화, 예인들의 예향문화 등이 두터운 곳이다. 이처럼 안목 높은 향유층들이 많다보니 다양한 종류의 고품질 한지가 많이 제작될 수밖에 없었다.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 그리고 물의 배합으로 만들어진다. 따뜻한 남쪽의 특성상 닥나무와 황촉규 공급은 어렵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이다. 물이 깨끗해야만 좋은 품질의 종이를 뜰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흑석골 공수내’이다. ‘공수’ 뜻이 ‘물이 차고 넘친다’는 뜻이다. 그만큼 공수내는 깨끗한 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자연히 흑석골 사람들은 공수내를 중심으로 한지공장을 차렸고 한지 뜨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현재는 복개공사로 인해 공수내가 추억 저편으로 남게 되었으나,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전주 흑석골하면 전주 한지를 떠올렸다고 한다.


전주시는 전주 한지의 명맥을 이을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2017년에 천일한지 김천종, 용인한지 김인수, 전주전통한지원 강갑석, 성일한지 최성일을 ‘전주 한지장’으로 지정했다. 모두 30년 이상 전주 한지 제조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장인이다. 2021년 4월에는 한국전통문화전당에서 ‘전주 한지장 후계자 양성’을 추진하고 있다.


부채와 지우산 장인이 모두 있는 전주

기원전 중국 한나라(漢代)부터 부채(扇)와 우산(傘)은 가장 존귀한 존재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휘장 아래에 부채를 들고 앉아있는 묘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비단이나 종이로 부채와 우산을 만들어 행렬에 가장 중요한 사람과 동행한다. 부채와 우산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세분화된 공예품이다. 귀족의 상징과 같은 부채와 우산을 만드는 장인이 모두 전주에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우산장 윤규상의 지우산
우산장 윤규상의 지우산
부채를 든 선자장 김동식
부채를 든 선자장 김동식


선자장 김동식 “우리 전통기술이 아랫세대에 잘 전승되길”

전라감영이 유지됐던 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선자장은 중앙동 전라감영을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전라감영이 없어진 이후 다수의 선자장은 인후동 가재미마을로 이전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김동식 보유자 또한 가재미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선자장 김동식의 핏줄은 외가에서 비롯되었다. 외할아버지와 외삼촌 모두 평생 부채를 만들던 장인이었다. 농한기에 외삼촌이 부채를 만드는 것을 보고 김동식은 조금씩 따라하였다. 이를 본 외삼촌이 “너 솜씨가 있구나”하고 칭찬하였고 14살부터 본격적으로 배웠다고 한다. 부채가 한창 잘 나갈 때는 1년에 3천만 원, 5천만 원씩 벌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선풍기와 에어컨이 나오고 나서 부채로 큰돈을 벌기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 다른 일을 해야하나 깊은 고민의 시절도 있었다. 그 시기, 부채를 계속 하라며 금전적 지원을 해준 선배가 있었다. 그날부터 김동식은 악착같이 부채일을 하며 지금까지 오게 됐다고 회고한다.


선자장 김동식의 작업 모습
선자장 김동식의 작업 모습
선자장 김동식의 공방 모습
선자장 김동식의 공방 모습


“그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어요. 나의 뭐를 믿고 돈을 줬을까 생각해요. 형제간에도 돈 빌리기 어려운 세상에서. 그 돈으로 악착같이 노력했어요. 그 돈으로 지금까지 오게 됐지.”


선자장 김동식은 2007년에 전북무형문화재로, 2015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인정되었다. 2019년 전북도립미술관 서울관에서 <합죽선, 60년> 展, 2020년 전주부채문화관에서 <합죽선 대를 잇다> 展, 2021년 교동미술관 <현존하는 가치> 展과 용산공예관 <부채, 남실바람이어라> 展 등 특별전을 이어가고 있다. 김동식의 바램은 한국의 전통기술 합죽선이 아랫세대에 잘 전승되는 것이다.


“좋은 부채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부채를 어떻게 하면 후세에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요. 김동식이 만든 부채는 아주 최고였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주길 바라지요.”

우산장 윤규상 “도전정신으로 복원한 전통기술”

전북무형문화재 우산장 윤규상 보유자는 우산장들이 모여 살았다는 장재마을에서 지우산 만드는 법을 배웠다. 가까운 곳에서 일을 배우기 위해 자연스럽게 지우산을 만들기 시작했다. 17살부터 우산공장에 출근해서 우산을 만들고, 밤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했다. 1965년 비로소 자신만의 우산공장을 차렸다. 그는 1980년대까지 지우산과 비닐우산을 생산하였다.


지우산의 핵심기술은 대나무를 다루는 기술이다. 대나무는 임산물에 속하기 때문에 그대로 들고 오면 검문소에서 잡았다고 한다. 검문을 피해 소가 끄는 수레에 대나무를 싣고 천변과 소양산을 지나 전주로 들어왔다. 대나무를 받으면 대를 쪼갠다. 우산 꼭지에 살대를 끼워 접었다 펼 수 있도록 조립한다. 그렇게 지우산에서 비닐우산까지 한국 우산의 변천사를 관통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우산이 대량생산되기 시작하면서 우산일을 접게 되었다.

우산장 윤규상
우산장 윤규상

그러다 약 17년 전, 한국에서 지우산이 잊히는 것을 알고 지우산 제작기술을 복원하기로 그는 결심하였다. 분업화로 이뤄졌던 것이라 한 사람이 온전히 습득하기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윤규상은 지우산 제작을 완성하였고, 2011년 전북무형문화재로 인정되었다.


2016년 재단법인 예올에서 <올해의 장인 – 우산장 윤규상> 展, 2020년 전주공예품전시관에서 <입춘, 봄비 내리다> 展, 2021년 교동미술관에서 <현존하는 가치> 展을 통해 전통 우산을 알리고 있다. 그는 모든 과정을 ‘도전’과 ‘실험’으로 부딪혀 나아갔다고 회고한다.


“매사 도전정신을 가지고 일을 하는 거 같아요.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찾고 개선해보자는 마음을 가지고 항상 일합니다. 지우산도 그렇게 복원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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