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예를 계속하게 하는 원동력은
창작욕이에요
** 해당 인터뷰는 부여의 20대 청년 공예가 그룹 b2y 단체전〈공주, 공예, 공감〉展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사람
도예가 오하람 입니다. 도자기는 도예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배웠어요.
도예고등학교 다니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기술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는 거였어요. 예를 들어 석고틀 작업을 할 경우 산업도자를 평가절하 된 시각으로 바라보더라고요. 기술이라는 것이 수평적인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위계가 있다고 느껴졌어요. 애들이 자연스럽게 그걸 학습하고 자기들의 사고 방식으로 습득해요. 그래서인지 물레 잘 차는 애들이 자부심이 있었어요. 물레 부심이라고.
고등학교 때 전통대 공모전에서 수상한 적이 있어요. 특선 조건을 보니까 전통대 입학 자격이 주어진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전통대 입학을 결심했어요. 도자기를 배우겠다며 입학했지만 다니다 보니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제가 공동 작업장을 굉장히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공동 작업장에서 내가 새로운 것들을 연구해서 쏟아붓고 있을 때 옆에서 보고 쓱 베껴가는 느낌이 들 때 견딜 수 없더라고요. 공동 작업장에서는 집중을 못한다는 결론을 짓고 이론반으로 가게되었습니다. 대학교 때 어찌됐든 도자 작업을 하고 싶었는데 못하니까 작업에 대한 갈증이 생겼어요. 결국 집에서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집에서 작업 하는 쪽으로 시간을 썼습니다.
저는 쪼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작업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못 따라할 경지까지 밀어붙여요. 작업 결과물로서 나만의 영역을 만들어가고 싶은 욕구인 것 같아요. 천성인거죠. 쪼잔함이라는 것도 내 거를 만들고 싶다는 게 커서 그런 것 같거든요. 내 영역을 침범한 게 느껴지면 너무 싫은거죠. 그게 아니면 그렇게까지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을 것 같긴 해요. 나의 영역, 나의 아이디어가 굉장히 중요한 사람이에요.
솜씨
차도구를 최대한 간략하게 줄여 일상에서 간편하게 사용될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어요. 시중에 나와 있는 차도구의 한계가 무엇일지 고민하다 유리 티팟을 관찰하게 됐어요. 유리 티팟의 문제점은 티팟 안의 거름망을 빼지 않고 계속 뜨거운 물에 담아두는 형태라 차의 농도가 계속해서 진해진다는 거였어요. 티팟의 문제점을 해결하여 제 작품에 반영시켰어요. 충분히 우려졌다 싶으면 거름망을 빼고 뚜껑을 덮어 원하는 만큼 우려서 마실 수 있도록 제작하였습니다.
차를 마실 때 음차, 품차, 평차 크게 세 가지로 나눠요. 음차는 목이 말라서 음료로서 마시는 차, 품차는 즐기면서 마시는 차, 평차는 산지, 농도 등 다 따지면서 마시는 차인데요. 저는 음차와 품차 정도의 범주에서 마시는 분들이 사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아무 부담 없이 차를 음료처럼 즐기고, 수다 떨면서 차 한 잔 내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제 작품이 일상에 녹아들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산업화 이후에 너무 많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잖아요. 그 결과물로 환경도 안 좋아졌고 물건값도 내려가고. 물건이라는 게 너무나도 하찮게 돼버린 거죠. 저는 물건을 만드는 입장으로서 사람들이 물건의 가치를 잊어버린 것 같아서 아쉬워요. 작품을 만듦으로써 그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게 잘 만드는 길이겠구나 싶어요. 잘 만들어서 이걸 사용하는 사람도 행복하고 만드는 사람으로서 나도 보람차고 좋을 거예요.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전세품을 만들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수공예품이 가지는 가치를 지키고 싶어요.
지역
저는 문경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문경에서 작업하고 있어요. 문경에서는 찻사발축제라고 장작가마로만 빚은 그릇들을 선 보이는 축제가 있어요. 장작가마로 빚는 전통이 만들어진 배경은 지역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했던 지역주민의 의견이 반영된 거예요. 문경 주변 도시들의 도자 사업 규모가 확대되면서 이 사이에서 문경이 살아남으려면 특색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대요. 그 특색을 만들기 위해서 장작가마만 쓰자는 전통을 만든거죠. 때마침 천한봉 할아버지가 찻사발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문경이 차 그릇을 빚는 지역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어요. 사발의 확대와 장작가마라는 특색이 맞물려 문경의 정체성이 확립된거죠.
제가 20대 초반까지만 해도 문경은 팽창기였어요. 외부 사람들이 문경에 정착하기 시작하고 오랫동안 나무를 연소시켜 떼는 번조 기법이 유행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그것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죠. 문경이 아니었다면 장작가마 불을 이만큼 자주 만날 수는 없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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