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남원시

내가 해야 하는 건 소리구나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 양림길 54 국립민속국악원

소리꾼 방수미


직    업   소리꾼

연락처   문의 후 방문 / 010-8787-9672

이메일   soribang875@naver.com

S  N  S   @soribang75


참 여   2022 무형유산 기획공연〈장인의 발걸음〉



#소리 #소리꾼 #남원

만남일_2024.02.14

에디터_설지희, 최아현|사진_이정준, 인터뷰이 제공

내가 해야 하는 건 소리구나


전북 남원시


소리꾼  방수미


직 업   소리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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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soribang875@naver.com

SNS   @soribang75



#소리 #소리꾼 #남원

만남일_2024.02.14

에디터_설지희, 최아현

사진_이정준, 인터뷰이 제공

만남


정말 좋아하는 일을 만나면 ‘조금만 더 일찍 시작했다면…’ 하는 하릴없는 상상을 하게 된다. 재능을 일찍 발견했다고 해서 그 과정이 무작정 아름답고 순탄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상상만하던 삶을 살아낸 이가 여기 있다. 유년시절부터 국악을 시작했다는 소리꾼 방수미를 만나 일찍 찾은 재능을 완연하게 꽃 피우기까지의 우여곡절을 들었다.


사람


서울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졸업했어요. 졸업할 시기쯤 국립민속국악원이 있는 남원으로 내려오게 됐고요. 인생의 반은 서울에서, 또 나머지 반은 전라북도에서 보내고 있는 방수미입니다. 


어릴 때부터 소리를 해서 계속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국악고등학교 입시에서 떨어졌을 때, 한 번 크게 좌절했어요. 그러면서 소리도 싫어졌어요. 이때는 제 마음속에서 소리를 거부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고요. 그런데 한참 방황하던 시기에 어머니가 소리 하지 말라고 하니까 눈물이 나더라고요. 그렇게 판소리로 대학 입시를 준비해서 추계예술대학에 갔죠. 학교에서 장학금도 주고, 우여곡절 끝에 소리도 다시 시작해서 ‘그래, 내가 할 게 이거구나’ 싶었지만 사실 감사한 줄 몰랐죠. 대학 시절도 엄벙덤벙 지나갔던 것 같아요. 새로운 감각을 느꼈던 건 서른쯤 직장에 들어오고 나서였어요. 처음으로 제 목소리가 너무 잘 들렸어요. 동료들과 앉아서 대본을 읽는데 제 목소리가 무척 마음에 드는 거예요. 그때 소리를 시작한 지 26년 만에 처음으로 이걸 계속할 수 있도록 해준 부모님께 감사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정말 더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요. 

솜씨


저는 커튼콜을 하면 항상 울어요. 공연에 혼신의 힘을 다 하는 편이거든요. 제가 모든 걸 두루 잘할 수 있으면 좋은데, 하나씩밖에 하지 못해요. 그래서 공연 하나 준비하려면 그것만 해야 해요. 그래서 종종 공연을 만들고, 소리를 하다 보면 제가 없어지는 기분이 들기도 하고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멀티가 안되는걸.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4년 차에 했던 ‘콜비츠와의 대화’예요. 이 작품을 만들게 된 이유는 코로나19 때문이었어요. 그때 전국의 모든 공연장이 멈췄잖아요. 그때 동료 중에 양혜원 씨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진작 공부해서 직장에 들어가거나 공무원 할 것을 그랬다고. 공연을 못 하니까 먹고 살길이 요원하다고. 그 말을 듣는데 가슴에 멍이 드는 것 같더라고요. 너무 속상했어요. 그래서 그 길로 알고 지내던 기획자 김지훈 씨를 찾아갔죠. 우리 공연 만들자고요. 때마침 제가 황우준 작곡가님과 친하게 지냈어요. 그런데 그분이 소리꾼을 만나면 콜비츠를 인용해서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하셨대요. 이미 콜비츠에 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전에는 귓등으로도 안 들었거든요. 그러다 이 시점을 계기로 기획해서 만들게 된 거예요. 어려운 시기에 후배들이 집중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요. 또 공연을 올려서 우리 팀 ‘하랑가’ 후배들에게 임금을 주고 싶기도 했고요. 그렇게 같이 먹고, 자고, 소품 만들고, 연습하면서 공연을 올렸죠. 다행스럽게도 작품이 잘 됐어요. 창작 지원도 받았고, 상도 많이 받았고요. 4년간 공연을 올렸어요.


지역


제가 사촌 중에 가장 막내였어요. 언니, 오빠들이 전부 고등학생, 대학생 그랬죠. 4살쯤이었나? 제가 혼자 연기하고 이런 걸 정말 좋아했대요. 그래서 사촌 언니, 오빠들이 저를 업고 탤런트 학원에 시험을 보러 간 거예요. 부모님 몰래요. 그런데 덜컥 학원 시험에 붙어버린 거죠. 그렇게 배우를 시켜보려고 아역배우들 다니던 탤런트 학원에도 다니면서 드라마 단역도 했고, 연극도 몇 번 했고. 발레 학원도 다녀보고요. 그런데 이것저것 시키다 보니 배우가 생명력이 별로 길지가 않겠다는 생각이 드셨대요. 


그러다 국악을 한 번 시켜볼까 하신 거죠. 그때 동네에 엄청 유명한 국악학원도 있었거든요. 그 학원에 당시 유명했던 오갑순 선생님이 계셨어요. 선생님께 한국무용도 배우고 가야금 병창도 배웠죠. 그런데 그때 제가 소리하는 걸 유난히 좋아했대요. 그래서 전공을 소리로 바꾸게 됐어요. 마침 또 동네에 소리로 유명하신 국가무형문화재 성우향 선생님도 계셨고요. 그분에게 본격적으로 소리를 배우게 됐죠. 엄청 재미있었어요. 선생님도 정말 좋았고요. 국악을 시작한 건 4살 때, 소리를 시작한 건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인생의 90%를 예술을 하면서 자란 거죠. 그러다 보니까 그 모든 경험이 지금 크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소리만 하고 있지 않거든요. 창극도 하고, 라디오도 했고요. 그 모든 경험이 다 피가 되고 살이 됐어요.


인사


무대에 올라가면 여전히 떨려요. 긴장도 되고요. 그래도 한 가지 잊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진심이라고 대답할래요. 이제는 잘하는 것에 욕심내지 않아요. 예전에는 내가 정말 잘해서 사람들이 모든 사람이 국악을 좋아했으면 하고 바랐어요. 그런데 요즘은 취향의 시대잖아요. 국악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죠. 이렇게 생각하니까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더라고요. 공연을 하는 사람은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를 전하는 것뿐이에요. 대단히 잘하는 것에 욕심낼 필요도 없고요. 또 모르죠? 누군가 제 공연을 보고 국악을 좋아하게 될지도요. 그래서 매 공연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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