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진구

불광불급, 다회(끈목)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서울특별시 광진구 아차산로 379

다회장 임금희


직    업   다회장

이메일   hmj6601@naver.com

연락처   문의 후 방문 / 010-7315-0531






#끈목 #광다회 #다회장

만남일_2024.02.22

에디터_설지희, 최아현 | 사진_이정준

불광불급,

다회(끈목)에 미친 사람이었어요


서울 광진구 아차산로 379 송산빌딩 401호


다회장  임금희


직 업   다회장

이메일   hmj6601@naver.com

연락처   010-7315-0531 



#끈목 #광다회 #다회장

만남일_2024.02.22 | 에디터_설지희, 최아현 | 사진_손하원

만남


기록한다는 것. 모두가 입을 모아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어느 경지에 올라 기술을 체득하고 있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쓰는 일이 익숙하지 않아서도 있고, 이미 너무나 당연한 정보이기 때문에 중요성을 놓치기도 한다. 그러나 자신의 기술만큼이나 기록에도 마음을 다하는 사람을 만났다. 사라져 가는 기술을 보전하는 것과 후세의 누구라도 볼 수 있도록 기록하는 일까지 모두 놓치지 않은 다회장 임금희다.


사람


경상북도 영주에서 1961년 11월에 태어났어요. 추운 동짓달에 태어난 8남매 중 막내였죠. 소띠면서 동짓달에 태어났으니 한가하게 살았을까 싶지만 정반대였어요. 평생 일하고 있으니까요. 어릴 때는 그 시절 학생들과 비슷했어요. 시를 좋아했고, 자수를 놓았죠. 친한 친구들 몇몇과는 몰려다니며 공원에 앉아 미래를 구상하고요. 근처에 과수원이 있었는데, 거기서 사과 서리도 하고요. 그렇게 대학교 졸업까지 영주에서 지냈어요.


졸업하고 83년도에 서울로 올라와서 회사에 취직했고요. 남들 다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취직했는데도 토요일만 되면 공허하더라고요. 그래서 고궁이란 고궁은 다 돌아다녔어요.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건물 양식도 구경하고, 문양이나 색감도 둘러보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에는 그 앞에 있던 교보문고에서 그 많은 책 중에 제가 집은 게 지금은 작고하신 고(故) 김주현 선생님이 집필하신 책이었어요. 거기서 처음 다회를 만났죠. 기가 막히더라고요. 그냥 단순한 매듭이 아니라 매듭의 형태를 활용한 작품이었어요. 한강을 만들고 해가 떠 있고, 그 앞에 고궁이 있는 작품이었어요. 그때 완전히 매료 돼버려서 냅다 출판사에 전화했죠. 그게 스승님과의 인연의 시작이었어요. 당시에 어디 의지할 곳이 없고 외로우니까 더 빨리 몰입했던 것 같아요. 제 인생의 갈림길을 만나게 된 순간이었죠. 그대로 회사를 용감하게 그만뒀어요. 다회를 배우고 싶었거든요.

솜씨


제가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서 한 개를 가르치면 열 개를 아는 타입은 아니에요. 많은 시간을 들여서 묵묵하게 하나를 완성하는 타입에 가까워요. 대신 하나를 위한 몰입은 확실하게 하고요. 연구하고, ‘왜?’라고 묻고, 이해될 때까지 물고 늘어지고요. 그러니 가르치시는 선생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냥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데 자꾸 이것저것 캐물으니까 귀찮기도 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선생님은 오히려 그런 점을 높게 사주셨어요. 


느지막이 논문을 쓰게 된 건 직기 때문이었어요. 사실 다회라는 게 한국에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중국에도 있을 것이고, 일본에도 있을 것이고요. 많은 비판 중의 하나가 제가 만드는 광다회(廣多繪)가 일본식 다회라는 거였어요. 그런데 제작기술과 재료 등 분명히 달라요. 저는 우리나라 유물을 기반으로 재현하거든요. 그때부터 이걸 소명하는 게 저에게 큰 과제가 됐어요. 직기의 차이점을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연구를 시작했던 거죠. 걸개의 간격도 다르고, 추의 개수도 달라요. 이를테면 일본의 틀에는 상하교차조가 4단까지밖에 없어요. 우리 유물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6단 이상을 사용해야 합니다. 일본의 기계는 이미 4단이기 때문에 만들 수가 없는 거죠. 기계의 설정값이 다르니 끈의 모양도 다를 수밖에 없고요. 그러다가 562년에 한반도에서 다회와 다회기술자가 초대되었다고 전해지는 일본 서적을 접하게 되었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죠. 당시에는 실제로 한반도에서 많은 문화와 기술을 일본에 전달하던 시절이었고 그 과정도 책에 적나라하게 나와 있으니 확신을 가지고 논문을 썼죠. 47살의 일이에요. 컴퓨터도 잘 못하는데 논문 쓰느라 엄청나게 고생했어요. 


지역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라고 하잖아요? 이름에 걸맞게 근처에 유서 깊은 장소들이 참 많아요. 소수서원, 부석사 무량수전 같은 고적이 많죠. 옆 동네는 안동이고요. 제가 다회에 쉽게 빠져들 수 있었던 것도 지리적인 특성이 반영된 것 같아요. 전통적인 것들을 익숙하게 접하고, 귀담아들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던 거죠.


자라는 동안 아버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막내라 유난히 귀여워하신 것 같아요. 무릎에 앉혀놓고 옛날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셨거든요. 호랑이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큰 집이 있는 순흥과 관련된 이야기 같은 것들이요. 이야기와 관련된 고적이 있으면 데려가기도 하시면서요. 제가 다회에 대한 열망이 이글거렸을 때도 아버지는 늘 응원해주셨어요. ‘적극적으로 해라. 늦지 않았다. 얼마든지 지금부터라도 공부해라.’ 정신적인 지주셨죠.



인사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었던 건 사명감 때문이었어요. 우리 스승님이 한국에서 유일하게 광다회의 명맥을 잇던 사람이고, 나는 그분께 배운 사람이니까 맥이 끊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사람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내일 죽을지도 모르고요. 선생님께 배우고, 제가 체득한 것들을 전부 기록으로 남겨서 국회 도서관에 자료를 보관하고 죽자는 마음으로 했어요. 기록은 제가 떠나도 남아있잖아요. 그래야 그 이후에 누군가 또 다회에 마음을 빼앗겨도 공부할 것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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