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돼요. 안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전북 완주군 용진읍 완주로 462-9
직 업 소목장
메 일 byungjinso@hanmail.net
운 영 문의 후 방문
#전주장 #국가무형유산 #소목장
만남일_2024.02.15 | 에디터_윤소영, 최아현 | 사진_손하원
만남
낭중지추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 일을 시작하면 늘 눈에 띄었고, 자신이 꾸는 꿈은 모두 이루며 살아온 사람. 화려한 이력만큼이나 당당한 그의 목소리에서 여전히 꿈틀대는 열정이 느껴졌다. 조선 17~19세기에 유명했던 전주장을 복원한 소목장 소병진 선생님을 만났다.
사람
나에게 붙은 이름이 많아요. 대한민국 최연소 가구 명장이고 소목장이죠. 항상 목표를 정하고 이루기 위해 애썼어요. 목수 일을 배우기 시작할 때는 더 좋은 곳에 가서 배우고 싶었고, 전주장을 봤을 때는 복원하고 싶었죠. 늘 그에 걸맞은 목표를 세웠어요. ‘최고의 기술을 배워야겠다.’ ‘출품을 해서 명장이 되어야겠다.’ ‘전주장을 복원하고 관련 기록을 남겨야겠다.’ ‘무형문화재가 되어야겠다.’ 항상 꿈을 꾸고 그 꿈을 이루면서 살았어요. 성장과 진화가 제 삶의 동력이었죠. 지금 일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꿈을 꿔요. 이제는 박물관을 만들고 싶거든요. 전주장과 관련된 기록들과 자료들을 모아서 전시하고 교육하는 공간이요. 쉽지는 않지만 노력하고 있어요. 안 할 이유는 전혀 없잖아요. 하면 되는 거예요. 하다 보면 언젠가는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솜씨
전주장은 조선시대에 고안된 농이에요. 옛날에는 목수를 집으로 불러, 형편과 공간에 맞게 집주인과 협의해서 장을 만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부자들이 사용하는 혼수품 중 하나였죠. 아무래도 고가이다 보니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맥이 끊겼어요. 인사동의 어느 가게에서 전주장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 존재를 알지 못했으니까요. 그렇게 전주장을 만났을 때, 꼭 복원하겠다고 다짐했죠.
저는 전주장을 복원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어요. 전주장이 보통 100년~200년 전에 만든 거예요. 수리하려고 보면 눈이 제일 많이 가는 곳이 문짝인데, 그게 다 터져있어요. 세월이 지난 탓도 있겠지만 아교가 시간이 지나면서 제 역할을 못 하게 되니까 뜨면서 터진 거예요. 이걸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하고 오랫동안 연구했어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 해봐도 터지더라고요. 한국이 사계절이 있는 나라잖아요. 겨울에는 나무가 줄었다가 여름에는 부풀어버려요. 습기를 먹었다 뱉었다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꾸 틈이 벌어져서 부서지고 터지는 거죠. 계속 고민하다 고안한 방법이 이 사이에 한지를 붙이는 거였어요. 발명 특허도 냈죠. 나무를 접목할 때 한지를 넣는 거예요. 한지는 닥나무로 만들죠. 그 닥나무의 섬유가 질기니까 나무를 딱 잡아주는 거예요. 목재가 지니고 있는 수축과 팽창을 막아주는 거죠.
지역
여기 완주군 용진읍에서 나고 자랐어요. 처음 일을 시작한 건 65년도에요. 그때 완주는 농사만 짓는 동네였어요. 가난한 시절이었죠. 기술을 배우러 다닌 곳은 전주였어요. 신작로 자갈길을 20리씩 걸어 다니면서 일을 배웠어요. 김석한 씨가 사장으로 있던 전주의 중앙가구로요. 우리 집안이 소목 일을 하던 가문이었는데 당시에 팔촌 형님이 중앙가구에서 공방장을 하셨어요. 어머니께 목수 일 하고 싶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팔촌 형님이랑 다리를 놔주셔서 들어가게 됐어요. 당시에 중앙가구는 전라북도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공방이었어요. 최고였지. 그 시절에 거기에 일하는 사람만 50명이었으니까. 시작을 잘했던 것 같아요.
인사
소목 일이 제일 재미있어요. 최고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요. 계속해서 머리를 쓰잖아요. 그뿐인가요? 큰 근육, 작은 근육, 손, 발을 계속 써야 해요. 그러니 계속 재미있을 수밖에 없어요. 짜맞춤 가구라는 것이 모든 퍼즐 조각을 만들어 뒀다가 조립하는 거잖아요. 수십 개의 나무 조각들을 전부 한 번에 딱 맞출 때의 희열감과 충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점점 빠져들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느 새 60년이 되었네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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