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매듭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406  국가무형유산전수교육관

국가무형유산 매듭장 전승교육사 박선경


직 업   매듭장

운 영   문의 후 방문 





#매듭장 #계승 #가업

만남일_2024.02.22

에디터_설지희, 최아현 | 사진_이정준

매듭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어요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406

매듭장 전승교육사  박선경


직 업   매듭장 전승교육사

운 영   문의 후 방문 


#매듭장 #계승 #가업

만남일_2024.02.22 | 에디터_설지희, 최아현 | 사진_이정준


만남


먹고 사는 것이 오래도록 화두인 세상이다. 더 안정적인 것, 더 이익인 것을 셈하느라 바쁜 세상에서 전혀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삶의 방향키를 움직인 사람을 만났다. 흘러가는 대로, 때로는 자신이 욕망하는 대로 삶을 꾸리며 4대에 걸친 무형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매듭장 박선경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


어릴 때는 무용을 했어요. 초등학교 때 현대무용을 시작해서 고등학교까지, 공연도 하고, 시나 도 대회도 나가고요. 대학에서도 무용을 전공하긴 했는데 진로를 정해야 하는 갈림길에서는 무용을 선택하지 않았죠. 오랫동안 하다가 그만두기는 했지만 후회는 없어요. 예술이라는 큰 틀에서는 매듭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무엇보다 그 경험들이 저에게 너무 좋았고요. 무용하면서 꾸준함과 인내심을 정말 많이 배웠어요. 그때 훈련한 것들이 지금 매듭을 하는 저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솜씨


저는 매듭 일을 4대째 이어오고 있습니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저로 이어지고 있죠. 자라는 내내 집에서 매듭 작업하시는 걸 보고 자라서 모든 과정이 익숙했어요. 할머니가 ‘너는 매듭을 해야겠다. 넌 재주가 있는 것 같다’ 라는 말씀을 종종 하시기도 했고요. 저도 매듭 일을 하는 게 좋았어요. 그리고 이런 시간들이 쌓이면서 자연스럽게 제가 매듭을 하게 되었죠.


할머니와 어머니가 일을 하시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매듭 일은 손을 움직이고 인지가 있을 때까지는 평생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고, 살면서 겪는 희노애락을 매듭으로 풀어 내시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돈이 안 되더라도 이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거창하게 매듭을 하겠다고 말한 적은 없어요. 늘 하던 일이니까.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잔심부름하고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면서 같이 실도 꼬고, 상여 술도 달고 그랬죠. 조금 커서는 어머니 작업도 도와드리고요. 어릴 적부터 꾸준히 일을 도우면서 배우고 있었던 셈이에요. 실질적인 매듭 작업 보조부터 주문을 받는다든지, 고객들 응대하는 것까지요. 주문 제작은 사람들과의 소통이 중요하고, 그로 인해 더 좋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게 돼요. 이렇게 일상처럼 곁에서 돕다 보니 오늘날의 제가 된 거죠.

지역


1964년 1월에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땐 암팡지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활발한 편이었죠. 오빠가 엄청 순했는데 누가 오빠 괴롭히면 빗자루 들고 가서 쫓아내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초등학교 가면서 말수도 없어지고 내성적으로 변했죠. 집안 사정으로 전학을 네 번이나 갔거든요. 이사도 계속하고, 친구들도 계속 바뀌니까 그랬던 것 같아요. 대학에 진학하고 조금 나아졌고, 매듭 일을 하고 여러 활동을 하면서 조금 더 활발해진 것 같아요. 나이가 제법 든 지금은 조금 수다스러워졌다고나 할까요(웃음). 내성적이던 어린 시절에도 해야 할 일과 마음 먹은 일은 꼭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했죠. 이런 저의 기질이 이 일을 직업으로 선택하게 했고, 지금도 항상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요.


인사


가계를 전승한다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에요. 특히 전통을 지키면서 경제적인 부분을 해결하기는 어렵죠. 많은 부분을 내려놓고 살아야 하는 것 같아요. 그래도 어려운 길을 선택한 것에 후회는 없어요. 작업할 때가 제일 좋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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